🔋휴대하는 철학

그리스 자연철학, 서구 과학과 철학의 시원

나는 과학책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렬하게 들었다. 특히 현대 물리학은 철학의 후손 내지는 자매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며 해석의 내용을 추상하여 개념에 담는다. 이 전 과정에는 사유의 연장인 언어가 사용된다.

과학은 세계의 구성체 중에서도 자연에 속한 사물과 현상을 탐구한다. 해석보다는 탐구의 작업에 가깝다. 근대과학의 활동은 ‘왜’를 묻기보다 ‘어떻게’(작동 원리)를 묻기 때문이다. 예컨대, 갈릴레이가 등장하기 전 유럽의 식자(철학자)들은, 물체의 운동을 물체가 본성(본래 위치)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 돌은 4원소 중 흙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본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이런 관념은 운동의 원리가 아니라 원인을 궁구한 끝에 형성된 것이다. 한편 고전물리학의 근간인 뉴턴역학은 운동의 원리를 다루지 물체가 운동하는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의 방법론이 ‘왜’에서 벗어나 ‘어떻게’에 더욱 천착해 나가는 동안 근대과학은 철학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 되어 갔다. 오늘날 과학과 철학을 동질적인 학문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른바 근대문명의 정신을 주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과학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와 면면히 연결돼 있음을 이 책 2장의 첫 대목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이 단락에 저자는 주석을 덧달아 놓았다. 그렇다고 하여 자연철학으로 회귀해야 함을 뜻하지 않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중심주의’라고 말이다. 사유에는 중심축이 있겠으나 다양한 지도리와 곁가지를 통한 연결과 넘나듦이 본질이자 핵심이 아닐까 싶다.

장마다 절마다 나올 것 같은데, 여기서도 개념을 하나 정리하고 가면 좋겠다. 자연철학의 ‘자연’은 헬라어 physis이다. 현대 영어의 nature의 어원인 라틴어 natura가 아니다. natura는 physis의 대응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의미 차이를 지닌다. natura는 “이미 로마적 또는 중세적인 뉘앙스를 띤 자연”이라고 한다. “중세에 이르러 자연은 모든 것의 근원이 아니라 ‘피조물’이 되어버리고, 나아가 인간 아래에 위치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스 자연철학 학파들

2장 퓌지스의 탐구에서는 밀레토스학파와 퓌타고라스 학파만 다뤄진다. 더 관심이 가는 후기 자연철학 이후는 3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먼저 고대 그리스 철학 전체를 표로 정리해본다. 주요 인물명 옆에 적은 연도를 참고하자.

“‘탄생의 문제”

저자는 최초의 철학 학파라 일컫는 밀레토스학파를 이야기하기 전에 “‘탄생’의 문제”라는 절에서 자연철학의 탄생이 그 이전의 사유라고 할 수 있는 “뮈토스의 사유”(“신화적⋅ 종교적⋅시적 사유”)와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의 문제를 먼저 짚는다. 각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의 논지가 약술되어 있다. 연속성을 주장하는 측(프랜시스 콘퍼드)은 철학의 주요 개념들(원리, 원인, 이법, 법칙 등)이 오리엔트 종교의 개념들(대표적으로 운명)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측(존 버넷)의 논지를 대표하는 문구가 익히 들어보았을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이다.

절충하는 입장(베르낭)도 있다. 오리엔트의 영향도 인정하고 아낙시만드로스에 이르러 생긴 큰 변화는 불연속이라 보는 것이다. 콘퍼드, 버넷, 베르낭의 연구를 인식론적 측면에서 분석한 가스통 바슐라르와 조르주 캉길렘의 철학도 서술되어 있다. 바슐라르는 ‘패러다임’이란 말을 유행시킨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과 학문적으로 교유했던 인물이다. 바슐라르의 입장은 인식론적 단절을 대변하는 쿤과 같다. 캉길렘은 그 대척점(즉 연속성)이 아니라 ‘부분 단절’을 주장했다. “뉴턴역학은 수식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역학에 포괄되지만, 시공간 개념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식론적 단절을 이룬다.”는 문장이 ‘부분 단절’의 뜻을 잘 설명한다.

이 절의 끝단에는 저자의 생각도 짧게 붙어 있다. 저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부분 단절에 동조하는 입장이지만, 이는 철학⋅과학의 경우에 도드라지는 특징이며, 그외 문화 일반에서는 연속성의 측면이 더 크다고 본다. 

밀레토스학파: 그리스 자연철학의 새벽

서양철학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이름, 밀레토스. 밀레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이오니아 지방(‘아나톨리아’로 불리는, 오늘날 튀르키예(터키) 영토의 아시아 부분의 남서부 해안 일대 지역)에 있던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밀레토스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탈레스 하면 그가 만물의 근원을 궁구하여 ‘물’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잘 알려져 있다.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할 때의 ‘근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아르케(archê)다. 아르케는 ‘근원’, ‘원리’ 등으로 번역된다. 밀레토스학파가 만물의 근원, 다르게 표현하면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는 것은 감각하는 실재가 세계의 궁극적 실재라고 여기지 않았음을 뜻한다. 우리의 감각적 차원 너머에 세계의 근원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철학의 시작이었다.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실재’ 탐구에는 이렇게 현상/현실을 가상(假象)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다.”(p.59~60)

저자는 밀레토스학파의 아르케 탐구에는 이것 외에 몇 가지 함의가 더 있다고 설명한다.

“多(여럿)에서 一(하나) 또는 몇 개의 근본 요소들/원소들로 나아갔다”

실로 무수한 존재들이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다자들이, 가령 화학이 밝혀낸 백 수십 개의 원소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고가 등장했다. 사물들의 개별성과 우연성보다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세계의 실재와 근원이라는 사유 형태는 오늘날 과학(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시간 및 운동의 제거”

현상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만물이 시간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현상세계’, ‘퓌지스’라는 말에는 ‘변화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설명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갖가지 감각을 가지고 세계의 변화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뜰지 서쪽에서 뜰지” 등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경험해봐야 알 수 있으니, 내일 해가 어디에서 뜰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아르케를 찾는다는 것은 시간의 이런 힘을 넘어서려는 몸짓이다.” 천체 운동의 법칙을 밝혀낸다면 내일이 되지 않아도 내일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장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동일성(identity)

시간과 변화를 제거해도 남는 것이 동일성이다. 동일성을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계속 운동하지만 그 공전의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한참 뒤에 등장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이데아, 에이도스)도 같은 사유의 토대에서 나온 개념이다.

인식론적 함의: 감성에 대한 이성의 우위

앞서 논한 함의들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검토한 것이라면, 현상 너머의 근원적 실재라는 사유는 감성보다 이성에 우위를 두는 인식론적 함의를 내포한다. “아르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난(for us)” 존재들이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서의(in itself)” 사물들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이 문장을 예시로써 쉽게 풀어준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와 그 자체로서의 무지개”는 구분된다. 전자(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를 ‘주관적’, 후자(그 자체로서의 무지개)를 ‘객관적’이라고 한다. 이때 주의할 점도 있다. 인식론적 맥락에서 주관과 객관은 일반적인 용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 존재론적 의미에서 객관적이려면 어떤 인식이 “현상을 너머 본질을 파악했을 때”이다.

“현실과 실재(서구어 ‘reality’가 이렇게 양의적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를 둘러싼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들이 철학사를 수놓게 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apeiron)

아낙시만드로스(BC 610~546/5)는 탈레스의 제자이다. 그는 스승의 존재론(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에 의문을 가졌다. 세계는 4원소(혹은 5원소)로 구성되는데, 물이 근원이라면 물과 대등한 원소인 불, 공기, 흙이 근원이 될 수는 없는가. 그는 물, 불, 흙, 공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보다 “더 아래에 있는 무엇”이 아르케여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 가정대로라면 탈레스의 난점이 해결된다. 즉 물에서 대등한 다른 원소들이 나오고, 여기에서 더욱 복잡한 만물이 나온다는 문제 말이다. 4원소 아래에 있는 무엇에서 4원소가 나오고, 4원소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라고 하면 탈레스 존재론의 비정합성이 해소된다. 

그럼 아래에 있는 무엇은 무엇일까. 물, 불, 흙, 공기 모두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존재이므로 물은 아르케가 될 수 없다. 아르케는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경험할 수는 없지만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볼 수는 없지만 사유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개념으로서만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을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했다.

아페이론(apeiron)이란 개념은 훗날 이 용어가 어떤 뜻으로 번역되었는지를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아페이론은 infinite(무한) indefinite(비일정/비한정)로 번역되는데, 아낙시만드로스는 후자의 뜻으로 그리고 그리스 철학 일반에서도 그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말로는 보통 무규정자 또는 무한정자로 번역된다.”고 하니 이런 풀이들을 통해 아페이론 개념에 대한 적확한 이해에 다가설 수 있겠다. 요컨대 아페이론은 물, 불, 흙, 공기로 분화되기 전의 혹은 네 가지 무엇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혹은 경계(페라스 peras) 지어지기 이전의 것, 즉 “페라스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무언가를 눈치채게 된다. 원전이 아니라 주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쉽게 해설하는 책들만 읽은 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이유가 아낙시만드로스가 다른 밀레토스학파 철학자들과 달리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개념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닌지 짐작해본다. 저자는 아낙시만드로스에 다다라 사유의 수준이 현저하게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수준 높은 이론적 사유가 등장한 최초의 현장”이며 “담론사의 핵심적인 한 지도리를 만들었다.”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메네스(BC 575~528)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다. 그는 스승과 스승의 스승 사이에서 고민했다. 탈레스는 너무 현상적이고, 아낙시만드로스는 논리적으로 수긍은 가지만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아낙시메네스는 경험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취해 ‘공기’가 아르케라고 간주하게 된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가 아르케로서 정합적이려면 공기가 물, 불, 흙으로 변하는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그는 ‘희박함’과 ‘조밀함’, ‘뜨거움’과 ‘차가움’이란 개념쌍으로 변화를 설명한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불보다 조밀해지면 바람이, 더 조밀해지면 구름, 물, 돌이 된다. 조밀함과 희박함을 만들어내는 것이 뜨거움과 차가움이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는 둘 다 일원론자인데 차이가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존재론적 층위를 두고 근본적인 층위인 아페이론이 그 위에 있는 층위의 존재들을 주재한다는 원리를 주장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는 아르케가 여러 변형태로 계속 이행해 간다는 원리를 주장했다.

퓌타고라스학파

퓌타고라스학파는 과학과 종교가 기묘하게 혼합된 특성을 보였다. 학파의 명칭으로 쓰인 인물 퓌타고라스(BC 580~500)는 사모스섬 출신으로 50세(추정) 무렵 참주 폴뤼크라테스와 대립하다가 섬을 떠나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해 크로톤에서 자리를 잡고 상당히 강력한 교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밀레토스학파를 접했고 오르페우스교와도 교류했다는 점에서 과학과 종교가 오묘하게 뒤섞인 이 학파의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퓌타고라스학파는 수를 신성시한 철학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퓌타고라스학파가 말한 ‘수’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퓌타고라스학파가 수와 사물을 혼동했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에는 물질성이 들어 있지 않다. 가령 우리가 숫자 ‘4’를 말할 때 그 숫자에서 사과 4개나 개 4마리를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퓌타고라스학파의 수는 “남자는 4, 여자는 3, 그래서 결혼은 7 같은 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른 ‘뜬구름 잡는 에피소드’도 소개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퓌타고라스학파의 수와 오늘날의 수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으며, 이런 경향 때문에 이 학파는 수비학(數秘學)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퓌타고라스학파가 수를 신성시하며 수를 통해 우주의 이법을 탐구하고자 한 데는 종교적 영향이 컸다.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은 불사이며, 본래 신들과 나란히 존재했으나 죄를 범해 지상으로 추방당한 존재”라고 믿는다. 이 교리는 영육 이원론의 전형인데, 이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되며, 지상의 인간 "타락천사"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사다리로 삼아 천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런 종교적 믿음에서 기인한 갖가지 금기사항이 퓌타고라스 교단을 규율했다. 영혼은 신성한 것인데, 일단 육체 속으로 들어가면 악해진다. 따라서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 천상으로 돌아가려면 ‘정화’(katharsis)를 행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퓌타고라스학파가 아낙시메네스의 사상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퓌타고라스학파는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을 영혼의 윤회전생설로 이해했다. 공기는 영혼과 통한다. 이들은 공기, 숨, 영혼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영혼이 본디 천상에 속하는 것이라면 천상의 이법을 탐구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할 수 있을 다. 퓌타고라스학파는 우주를 “모종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에게 우주의 이법을 탐구하는 지적인 노력과 신성을 살아가려는 종교적인 노력은 결국 같은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믿음 혹은 생각에 기반해 이 학파는 세계가 수학적 질서(즉 코스모스)로 되어 있다는 생각(믿음)을 정교화한다. ‘질서’(taxis) 개념을 함축하는 ‘우주’(kosmos)에는 아름답다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퓌타고라스학파는 수학적 합리성을 아름다움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음악, 기하학, 천문, 대수 등에서 비례, 대칭, 조화, 균형을 찾아 수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우주의 수학적 질서에 대한 탐구 자체가 곧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 화는 <3장 자연철학과 존재론>을 읽고 정리합니다. 3장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를 다루는군요.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으니 더욱 차분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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