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약선생의 철학공부, 공부철학

니체를 처음 안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 서점 진열대에서 당시 유행하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¹ 옆에 청하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²를 보았다. 마치 두 책이 형제라도 되는 듯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표지도 크리슈나무르티는 오른쪽을 보고 있고, 니체는 왼쪽을 보는 초상화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서점 아저씨는 왼쪽에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오른쪽에는 니체를 진열시켰다. 아저씨가 그걸 의도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표지의 두 인물은 정확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열여덟 살 무렵의 나는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당연히 철학이니 사유니 하는 세계가 어떤지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내 딴은 생각했었다. 단지 그 변화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주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샀다. 이 두 책에서 인생의 해결책들이 고추씨처럼 툭 터져 나와 내 정신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줄지 모른다는 무모한 기대를 했을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쉬운 언어로 되어 있어서 고등학교 시절 내가 완독한 몇 안 되는 책이 되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본문에 앞서 실린 ‘편집자 해설’, ‘짜라투스트라에 관한 논문’부터 도무지 단 한 단락도 읽을 수가 없었다.

본문을 펼쳐 들어도 증상은 마찬가지. 그러나 기묘한 일이다. 종잡을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 아름다운 정신들이 사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은 정신은 얼어붙게 하고, 가슴의 심장 박동은 더 크게 뛰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 이후로도 고명한 철학자로 군림하였을 뿐, 단 한 단락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는 철학자였다.

세월이 흘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연구소에서 공부한 지 얼마 안 있어서 게시판에 ‘니체 세미나’ 안내문이 떴다. 책세상판 니체 전집 스물한 권 중 유고를 뺀 저작 모두를 완독하는 프로그램. 시간은 일요일 오전 10시. 모두 교회로 가서 니체를 사랑할 사람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시간. 그러고 보면 너무나 반(反)-니체적이어서 그 시간에 니체를 읽는다면 ‘니체적인 너무나 니체적인’ 시간. 안내문에서 이 시간을 보자마자 나는 저 시간에 니체를 읽을 사람은 안내한 사람과 나뿐일 거라는 아연한 예단을 했다.

니체의 권능이 나를 니체 세미나에 끌어들이는 듯했다. 단 한 단락도 읽지 못했던 시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그 시절 가슴의 심장박동만 기억했다. 니체를 처음 본 젊은이는 속절없이 사라졌지만, 가슴만큼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니체 세미나가 생애 첫 철학 세미나였다. 까닥하다가는 동경의 대상이 내 지적 무능력과 몰이해로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은행에서 개조식 보고서가 실어 나르는 조직 언어에 꽉 붙들려 있었다. 명쾌하게 요약된 언어의 배열. 아들 녀석 잘 먹는 웨하스처럼 부서지기 쉬운 돈의 언어들. 영혼이라곤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개조식. 그러나 이제 온 힘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책을 오해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세미나 텍스트인 니체의 《비극의 탄생》³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한 페이지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지막지하다. 한줄한줄 읽어 나갈 때마다 마음은 속에서 곪아 갔다.

시간도 문제였다.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는 회사 일로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퇴근 이후 씻고 책상에 앉아서 읽어도 한두 시간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그 시간에 읽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다.

전혀 의미 해독이 되지 않는 독서를 일주일 내내 하였다. 줄을 긋고 읽었으되, 의미는 전혀 다가오지 않는 독서. 그러니 아시겠는가. 곪아 가는 내 속을.

한두 차례 이런 식으로 세미나에 나갔다. 수십 페이지 중 겨우 이해하는 몇 문장을 들고 가는 나는 마치 총알 한두 알 장전된 소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든 것 같았다. 세미나 시간은 두 시간.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두 시간을 보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겨우 존재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활용해 온 언어와 니체의 난해한 언어 사이에 거리는 멀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언어와 비실용적이고 비판적인 언어 사이의 이 거리가 바로 내가 선 자리와 니체가 있는 자리의 거리이다. 우선 이것을 정확히 해두는 게 필요했다. 나는 아주 먼 거리로의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와 진지하게 철학에 접근하는 공부는 여기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자신이 유용해질 리 만무한 공부다. 심장박동에 이끌려 한바탕 읽어도,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머리엔 무용한 문장들만 오락가락할 뿐이다. 철학의 언어는 자기계발의 기술을 이기지 못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패배가 확실하다는 사정을 이미 알고 걸어가는 길이다.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이었다. 평소에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집에서 어슬렁거리며 책을 읽었을 테지만, 그날은 도서관에 가서 다른 사람들 틈에서 책을 읽으면 뭔가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오후에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아갔다. 인문도서실 한구석에 니체와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각종 철학사와 관련된 책들도 꽤 많았다. 모조리 꺼내서 책상 한쪽에 쌓았다. 그 책 중에서 《비극의 탄생》과 관련된 부분만 골라서 읽고 메모를 했다.

어떻게 해서든 니체와 감응하고, 니체를 해석해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도서관 책을 찾아 메모하는 게 힘들거나 무의미해 보이면, 《비극의 탄생》의 문장들을 한 단락 정도 베껴 써보기도 했다. 교양서들에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 제각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랄발광이라 할 만한 행동이었다. 서가 두세 칸에 꽉 차 있는 니체 관련 책들을 모조리 꺼내서 옆에 쌓아 놓고 읽는 삼십대 중년 남성. 나는 지금까지 다른 교양서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철학 원전 텍스트에 집중해서 읽어본 적은 없었다. 세미나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 방도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탓에,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공포감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새로운 정신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좀 정확히 말하면, 문이 열리고 있었고 그런 징후들이 꿈틀대고 있었을 텐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저녁이 되자 그런 지랄발광이 아주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교양서나 철학사가 설명해주는 방식이 이 책이나 저 책이나 거의 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교양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똑같은 생각이 강화되었다. 예컨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한 것에서 해설서들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만을 옹호한다고 해설하는 경우가 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디오니소스적인 것만 강조하여 분열적인 행동을 찬양하는 예도 보았다.

그러나 오리지널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에는 언제나 쾌락과 역겨움(혹은 공포)이 함께 있다. 사람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속에서 삶의 한계를 넘어서므로 쾌락을 느끼지만, 동시에 해체되는 공포감 때문에 몰락한다. 니체는 이 무시무시한 것에는 종교나 인식, 그리고 예술과 같은 보호 장치 없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파괴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양의 디오니소스적 힘을 파내어 획득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렇게 강한 자는 아폴론적인 변용 능력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경계에 있으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 중심에 있으면서 언제든 경계에 갈 수 있는 사람. 그러나 해설서만을 읽고서는 이런 미묘한 내용을 스스로 찾아 구성하지 못한다. 해설서는 요약을 위해서 이런 미묘한 부분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리지널 텍스트를 해설하는 교양서들은 텍스트의 속살을 파헤치지 못한다. 철학의 언어와, 해설과 교양의 언어는 다르다. 후자는 정보를 집합시키고 요약하는 데 자신의 지면을 사용하지만, 전자는 그런 정보를 교란하고 새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집합하고 요약하는 것은 철학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기존 정보로 가득한 정신을 교란해야 할 언어가 오히려 기존 정보들의 연결을 더 촘촘하게 강화하는 것이다.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언어가 자신의 방향을 거스르고 요약하는 데 이용당하고 만다.

이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철학 공부라는 게 지금까지 내가 달고 다니던 언어들을 뜯어내고, 새로운 언어를 내 몸 새기는 일이 아닐까. 내 좁고 볼품없는 자취 집처럼 쪼그라든 정신의 공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러니까 이미 내 신체는 사회가 부여한 볼품없는 언어에 덕지덕지 감싸여 있었다.

토요일 봄날을 도서관에서 니체 해설서들을 모조리 읽는 데 바쳤다. 하루가 지나도 니체를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몸에 난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모조리 니체에게로 열리는 시간이 되었다. 니체가 찾아와서 니체의 곡절을 내 숨구멍에 풀어 넣도록 내 몸을 허하였다. 공부하는 자와 텍스트가 만나면 서로 닿도록 매만져야 한다. 내가 먼저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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