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존재들을 위한 새로운 생명론

글: 박영대

○ ‘자유의지’적인 삶 – 자책과 원망 사이

지난 시간에 중동태라는 새로운 문법 개념을 다루었다. 중동태란,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어떤 작용을 스스로 일으키는 게 아니라, 과정이나 흐름 속에 주체가 놓여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고대 그리스에는 분명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용법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중동태를 ‘철학적 개념’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언어는 언제나 그 시대의 사유와 관습, 문화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언어 용법이 있었다는 뜻은 그를 뒷받침하는 어떤 사유체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 중동태 아래에 있는 사유체계, 중동태를 통해서만 겨우 엿볼 수 있는 세계관을 탐사하고자 한다. 그 오래된 유물이 우리에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실마리를 줄지 모를 일이다.

언어의 역사에서 중동태와 능동태의 대립이 있었다면, 동일한 문제가 철학에서는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타났다. 자유의지(free will)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free)’과 ‘의지(will)’가 합쳐진 말인데, 여기서 ‘자유로운’은 ‘이를 결정짓는 원인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자유의지는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의지를 일컫는다.

서양철학에서는 고대부터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게 이어져 왔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이는 다른 원인 없이 오직 우리 자신으로부터만 순수하게 발현되는 ‘의지’가 있다는 게 된다. 그렇기에 자유의지를 옹호하고 요청하는 쪽에서는, 자유의지를 인간의 주체성과 윤리의 근거로 삼았다.

만일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상식에 어긋난다. 또 그런 경우 우리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도덕성을 함양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인정해야 하며, 인간을 ‘주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과 윤리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파도 있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을 부정하고, 외부 요소에 의해 작용받는 존재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 말도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가족의 말, 친구의 표정, 돈이나 명예 등등. 어느 때에는 행복을, 또 종종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순수하게 자유로운 의지를 상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잘 모르겠다. 이천 년 가까이 이어진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양쪽 모두 나름의 과학적, 심리학적 근거를 쥐고 있다. 아마도 이는 진리나 ‘팩트’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인간관이 더 마음에 드는지, 자신에게 더 유익한지, 혹은 더 좋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지를 놓고 결정내려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마다 상이할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냐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쪽에 판돈을 걸었다. 이쪽이 우리의 삶을 더욱 ‘리얼하게’ 묘사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연재의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불안으로 몰아붙인다는 판단에서다. 즉 주체성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삶을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하자면, 자유의지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이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지만, 그만큼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순수한 의지가 발현될 수 있기에, 내가 행하지 않았으면 그건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다른 외부 원인으로 핑계를 댈 수 없다. 연초에 결심한 운동이 작심삼일로 끝났다면, 이는 온전히 내 탓이며, 나의 노력이나 의지가 부족한 탓이다. 자유의지 개념은 이런 사고방식을 필연적으로 유발한다.

일의 ‘시작’만큼이나, 일의 ‘결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이 잘못되면, 그렇게 잘못되게 만든 ‘자유의지’에 원인이 있다. 왜냐하면 역시나, 그 밖의 다른 원인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사고의 흐름은 자연스레 ‘누구의’ 자유의지가 문제였는지로 흘러가고, 일이 틀어지게 한 ‘범인 찾기’에 몰두한다.

이때 나 아닌 누군가를 찾아내면 그에 대한 원망이 되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으면 자기에 대한 자책으로 마음은 흘러간다. 나는 자책과 원망이야말로 우리 삶을 좀먹는, 가장 나쁜 사유(또는 감정)라 보고 있다. 둘은 그 방향이 정반대이지만, 미움의 대상을 추궁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사유-감정이다. 그리고 이 추궁에는 자유의지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의지 개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만큼 자책과 원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자책과 후회 속에서 우울로 치닫게 되는 감정의 질주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원망과 분노로 말미암아 가장 가까워야 할 이들끼리 서로 외면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내가 자유의지 반대파에 선 것은 이 때문이다. 중동태 논의가 반가웠던 것도, 이 부정론을 훨씬 다채롭고 내실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서다. 능동태와 수동태 구도로만 세상을 보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나 사건도 ‘가해자 – 피해자’라는 틀에서만 이해한다. 이 가난한 틀은 ‘중동태’적인 풍부한 세계를 느껴보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 부정론을 더욱 밀고 나가 ‘진실하도록’ 만들고 싶다. 물론 이 경우엔 인간의 행동과 윤리성을 새롭게 설명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자유의지의 옹호론자들처럼 자유의지에 입각해서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과 윤리를 도출할 수는 없다. 새로운 윤리, 새로운 행동론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연재의 목적이기도 하다.

○ ‘외재화’의 사유 - 일본 당사자 연구에서

그렇다면 ‘자유의지 없는 우리’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 작은 삽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이 내용은 『책임의 생성』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다. 『책임의 생성』은 고쿠분 고이치로와 쿠마가야 신이치로(熊谷晋一郎)가 함께 강의/토론한 내용의 책이다. 고쿠분은 중동태에서 이미 소개한 바가 있고, 쿠마가야는 일본의 장애인 당사자 연구 및 활동를 이끄는 활동가다.

일본의 당사자 연구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자조’적 공동체 활동이다. 자조(自助)란, 스스로 돕는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과 전문의가 주도하는 기존의 의료 시스템을 거부하고 정신장애인들끼리 일상을 함께하며 스스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연구 및 활동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잘 정착한 활동이 드물기에, 더욱 애정과 관심이 간다.

이 책에서 쿠마가야는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공동체의 운영 방식을 소개한다. 거기에는 자유의지를 자제하려는 공동체 계율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공동체에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범인’을 찾고자 추궁하지 않는다. 인용문에서는 이를 “속인화하지 않는” 태도라 했는데, 우리의 맥락에서는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에게 잘못을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범인 색출은 어쨌든 특정인을 원인으로 꼽는다는 뜻이며, 그건 그 사람의 의지 외에 다른 원인이나 메커니즘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 대신에 문제 자체를 일종의 자연현상처럼 이해한다. 마치 비가 내리는 기상현상처럼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자연현상에까지는 자유의지를 투사하지 않는다. 곧 비가 ‘자유의지’를 갖고 내린다며 원망하는 일은 드물다. (물론 전혀 없는 일은 아니다.) 자연을 바라볼 때는 그 메커니즘이나 인과법칙을 생각한다. 여기선 사람의 일도 그렇게 보자는 제안이다.

정신장애인인 만큼 그들의 삶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험난할 것이다. 실수도 많고, 몸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훨씬 많으리라. 이로 인해 주변으로부터도 질책이나 분노를 적잖이 받아 왔을 것이고, 그것이 내면화되어 자책한다든가 스스로의 활동을 포기한다든가 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을까. 자유의지가 말 그대로 족쇄처럼 옭아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범인 색출을 금한다든가, 사람이나 의지 중심이 아닌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상황을 본다든가 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이를 “연구의 테이블에 올려서, 모두 왁자지껄하게” 모색한다. 즉 동료와 관계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 혼자서는 아무리 메커니즘을 찾아보려 해도 잘되지 않고, 일의 과정이 보이지 않으면 금세 ‘누구 탓’으로 빠지기 쉽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는 건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실제로 있고, 어떤 점에선 그런 삶이 더욱 건강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 불안의 원인 중 하나가 자유의지 개념이라면, 이제는 자유의지 개념을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우리 삶에 대한 긍정은 그저 결심만으로 되진 않는다. 삶을 부패시키는 것에 대해선 철저하게 부정하고 과감하게 단절해야 한다. 그제야 삶에 대한 긍정도, 존재의 건강도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

끝으로 다음 편 예고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쪽을 향해선 흔히 두 가지(실은 한 가지이기도 한) 비판이 제기된다. 하나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인간의 책임감도 사라지게 되어, 도덕이 무너진다는 문제제기다. 이때 자유의지는 책임과 도덕을 위해 ‘요청’되는 필수품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으로, 결정론이라는 비판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인간은 스스로 활동을 산출할 수 없고 외부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즉 물체와 다를 바 없이, 인간이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것이다. 인간과 사물이 구별되지도 않고, 우리의 삶 역시 결정된 대로 흘러갈 뿐이라는 공허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책임과 도덕이 부정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며, 이 때문에 하나의 연결된 비판을 이루는 경우도 많다.

이 두 비판은 자유의지 부정론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타당한 문제제기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오래도록 유사한 비판과 반박 들이 되풀이되었다는 점에서 고착화되어 있기도 하다. 아마도 반박을 위한 반박, 말로써만 성립하는 말을 지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게도 이런 비판들을 일거에 물리칠 수 있는 완벽한 정답 같은 건 없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 “불안한 존재들을 위한”, 우리만의 답이라면 작게나마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 편에서는 먼저 책임과 도덕의 문제를 다뤄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후엔 좀 더 신중하게 결정론의 문제를 얘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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