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약선생의 철학공부, 공부철학

벤야민 강의를 두세 번 듣고 나니까, 연구소에 어떤 과정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수유너머’ 말고도 ‘다중지성의 정원’, ‘철학아카데미’, ‘새움’ 등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아카데미 밖 공부방이 여럿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곳들이 대부분 세미나와 강좌 두 가지를 기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두어 달 되어 갈 때, 세미나 한두 개 더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시간이 지나가면 강렬했던 첫 순간도 잊히고 만다. 모든 일이 과거가 되어 간다. 다시 찾아오는 하루하루 회사 일들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첫 순간 강렬했던 감각은 식어서 돌덩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망각 속에서도 강렬했던 첫 순간의 감각만은 마모시키지 않고 남겨 두고 싶었다.

첫 순간의 감각은 선물과도 같다. 철학적 언어들이 공중을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느낌, 그리고 그 언어들이 무언가 강력한 것, 아름다운 것을 품고 나에게로 꽂힌다는 느낌, 그리고 이런 느낌이 신체와 정신에 스며들어 새로운 쾌락을 선사할지 모른다는 기대감. 내게 그것은 지금도 갖고 있는 철학에 대한 원(原)-감각이다. 이 원-감각을 마중물 삼아서 광대한 철학의 물줄기가 터진다. 아마도 내가 이 감각을 지키려고 몸부림친 덕에 이후에 올 철학의 행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세미나 목록을 둘러보았다. 마르크스, 니체, 들뢰즈, 근대 신문 읽기 등 다양한 분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이런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세미나 형식에 대해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강의라면 선생님이 강의 시간을 온전히 끌고 가므로 형식적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물론 나중에는 강의도 그런 수동적인 자세로는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세미나는 그날 분량을 읽고 와서 토론에 참여해야 하고, 돌아가며 ‘발제’(發題)라는 것을 해야 했다. 세미나는 강의와 비교할 수 없는 능동적 참여를 기대한다.

일반인이 이 문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서른아홉인 중년 은행원이 철학 세미나를 한다는 것은 낯설고 낯선 것이다. 니체나 들뢰즈의 원전 ¹을 직접 읽고, 발제문을 써서 발표하고, 낯선 사람들과 토론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배가된다.

근무지에서 가까운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다. 무작정 몇 페이지 읽어보려고도 시도했다. 대체 내가 이 책들을 읽고 요약이라도 할 수는 있을까 판단해보려고 말이다. 당연히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제 읽으려는 책은 내가 알고 있던 책들과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같은 책등, 같은 책꼬리, 같은 귀발이여도 내게 다가오는 힘 자체가 달랐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 두 책의 존재는 밤하늘 별과 나 사이만큼이나 먼 존재였다.

그래도 눈 밝은 망원경은 대낮에도 별빛을 옭아맨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세미나 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편한 것(물론 이조차 편한 게 아니란 걸 곧 알게 되었지만)을 골라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장편 읽기 세미나〉. 다루는 텍스트가 어려운 개념을 다룬 철학이 아니라, 장편 소설이나 서사시 같은 ‘이야기’였다. 그나마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겠다 싶고, 특히 발제가 없다고 알려진 세미나였다. 들어보니 10여 명이 그날 분량을 읽고 와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이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같은 그리스·로마의 장편 서사시를 막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리아스》를 샀다.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다. 첫 주에 백여 페이지 분량을 읽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죽 읽어 나갔다. 이야기이기 때문에 금세 읽으리라 보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등장하는 신이나 사람 이름, 그리고 그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런 혼란 속에서 금세 책의 흥미를 잃거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예컨대 이런 이야기를 보자. 아킬레우스는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고, 아이아코스의 손자다.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에 죽임을 당하자, 어머니 테티스의 부탁을 받고 헤파이토스가 만들어준 무구로 무장하여 출전해 헥토르를 죽이고 복수를 한다.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에게 전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몇 줄의 요약에도 신과 사람 이름이 난삽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아킬레우스와 관련해서도 오뒷세우스, 스승 켄타우로스 케이론, 스퀴로스 섬에 있는 뤼코메데스 왕, 그리고 소녀로 변장했을 때 이름 퓌르라(‘빨간 머리 여자’란 뜻) 등등 수없이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름들의 우물이다. 이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야기의 목적인 듯이 마구 이름을 지어낸다. 철학은 개념을 만들어내지만, 신화와 서사시는 주체를 만들어낸다.

이제 읽을 텍스트들은 지금까지 시험을 위해 읽던 참고서처럼 참고 설명이 전혀 없다. 말하자면 층수 버튼이 없는 엘리베이터에 얼떨결에 올라타서 완전히 무방비한 상황일 때 그 기분이다. 이런 기분은 그 이후 모든 텍스트에서 찾아왔다. 지금 읽고 있는 그리스 서사시뿐 아니다. 이후에도 소설을 비롯한 모든 서사 텍스트를 읽을 때는 그 이야기를 이끄는 이름들에 능통해야 했다. 언제나 이름에 익숙해지려는 방법과 노력이 필요했다.

천병희 번역본은 주석이 미주(尾注) 형태라서 읽으면서 미주를 참조하기가 영 어렵게 편집되어 있었다. 또 참조하라고 인명, 지명, 신과 영웅들의 가계도, 그리고 그리스 세계의 지도가 붙어있었는데, 이것도 본문을 읽다가 다시 뒤를 찾아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미주를 미워한다.

두 번째 주부터는 본문을 읽을 때 수시로 참조할 수 있도록 책 뒤에 붙어 있는 자료의 페이지들을 복사했다. 그 뒤로는 읽을 때 복사해 놓은 주석도 함께 읽으려고 노력했다. 종이에 가계도를 직접 그려보기도 하고,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과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을 연상해보려고도 했다. 의욕이 넘쳐서 서점 외서 코너에 가서 펭귄판 영문판도 사서 옆에 갖다 놓았다. 그때는 전혀 보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든든했다.

그래도 세미나가 돌아오자 살짝 긴장되었다. 그러나 그럭저럭 참여할 만한 것 같았다. 내 내면에는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 항상 존재한다. 나는 선천적으로 우수하게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선두에 서지 못하고 늘 조금 뒤처져 가는 사람이다. 선두에 서려고 힘들어한다든가, 뒤처지면 고통스러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할 일이 도래하니까 어쨌든 처리한다는 식이었다. 세미나도 어쨌든 돌아왔기 때문에 그 시간을 처리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세미나 시간에 돌입하자, 시간 내내 재미와 흥분이 가득했다. 《일리아스》의 장면 장면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전쟁 장면이 재생되면 마치 전쟁터의 구석구석을 카메라로 촬영하듯 사람들이 묘사를 해주었다. 아가멤논이 상대의 대열을 도륙하는 장면에서 아가멤논의 손놀림과 시선, 그사이 다른 병사들의 미세한 움직임, 그리고 상대 헥토르가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등장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는 트로이의 궁전 사람들. 물론 나도 어느 한 부분을 기억해내고 생생한 재현에 참여하였다. 처음에 들어갈 때 이상한 엘리베리터에 혼자 갇힌 기분이었다면, 점점 그 엘리베이터가 에버랜드 후룸라이드가 되어 갔다.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

혼자 읽기는 선형적으로 중요한 장면만 포착하게 된다. 마치 여행을 가서 풍경을 구경했지만, 드문드문 눈에 맺힌 부분만 기억해내고, 그 부분들을 이어서 제멋대로 그곳을 판단해버리는 것과도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담겨 있는 미묘한 부분들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즉 ‘혼자 읽기’로는 ‘깊이 읽기’가 쉽지 않다. 물론 혼자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대가로 요구한다. 낮에 별빛을 옭아매려면 혼자 만든 망원경이 아니라, 여럿이 만든 고성능 망원경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읽기는 세미나원 각자의 ‘혼자 읽기’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읽기로 도약시킨다. 특히 소설이나 서사시 세미나에서는 각자의 읽기가 결합하면서 한 편의 연극이 되었다. 혼자 읽기에서 보던 풍경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보인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니까 읽기의 기쁨이 배가 되었다. 덕분에 세미나는 웃음으로 가득했다. 세미나원 각자도 그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서 저절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마치 각본 없는 연극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 순간 텍스트를 경유해서, 그리고 텍스트를 넘어서서 서로의 정신이 결합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라는 작품 자체도 그러했다. 이 두 작품의 작가는 호메로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원전 8세기 말에 활동했다는 호메로스가 실제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이 작품들을 모두 홀로 쓴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심지어 《일리아스》 내의 여러 부분이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매끈한 형태가 아니라 ‘원(原) 일리아스’에다 후세 사람들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첨가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것은 헬라스인이 사는 그리스 본토에서 싹이 텄지만, 소아시아 서해안과 그 앞바다 섬들에 사는 아이올레이스족, 이오네스족, 도리에이스족 등 수많은 종족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 완숙해졌다.

그렇다면 결국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 조차도 원래 완성된 완제품-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상상과 작업이 결합한 조립품-이야기이고,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질 가능성을 품은 미래의 텍스트들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미나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라는 원(原) 텍스트를 앞에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첨가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미나라는 사건 자체가 새로운 작품이었다.

그때는 이런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내 마음 안에는 10여 명이 이루어내는 세미나의 하모니가 장엄하다고 여겼다. 아마 처음이라서 이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의 창조력을 과장해서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그 감각은 이후 모든 세미나에서 경험하게 된다. 세미나는 내 귓속에 은밀히 숨어 있던 낡고 오래된 정신의 귓밥들을 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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