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하는 철학

맥락 안에서 개념 살피기

<여는 말>을 통해 저자는 저술의 각 권이 구축될 지리적 지평을 설정해 보이면서, 20세기까지 주로 서구 철학자에 의해 쓰인 서양철학사에 내재된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 책임을 밝히고, 저술의 원칙(역사성)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1장 철학의 탄생>은 제목에서 짐작되듯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라는 시공간을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어떤 사건의 장소에 들어갔을 때 안내자는 그 장소의 역사적 특수성를 개괄하며 설명을 시작할 텐데 저자도 마찬가지다. <여는 말>이 저술 전체의 시공간을 개괄했다면, <1장 철학의 탄생>은 오늘날 ‘고대 그리스’로 지칭되곤 하는 ‘헬라스’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개괄한다. 그것과 철학의 탄생은 연관성이 있다.

학술적 성격을 띤 저술, 특히 철학서의 저자는 개념을 신중히 다룬다. 이 책은 특히 더 그럴 수밖에 없는데,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년 전으로 돌아가 지금과는 다른 개념이었던 ‘철학’의 처음 모습과 대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철학이 탄생한 그리스도 오늘날 그리스와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인 자신이 자기가 사는 곳을 불렀던 이름 ‘헬라스’라는 곳으로 가본다.

헬라스와 그리스

어원을 먼저 살펴보면, ‘헬라스’는 헬렌이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헬렌은 한민족으로 치면 단군에 버금가는 그리스인의 시조이자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는 그리스신화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낳은 아들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짐작했겠지만, 헬라스는 현대의 국민국가 ‘그리스’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라는 명칭은 그라이키아(Graeci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여는 말>에서 지중해세계가 포괄하는 지역들의 명칭을 인용했는데, 바로 그 세계가 헬라스를 구성했다. <1장>에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도’라는 그림으로 제시된다.(책에는 아래 그림지도를 보정하여 훨씬 단순하게 만든 지도가 게재되어 있다.)

노란색 대륙 덩어리는 위의 유럽과 아래의 아시아로 양분되어 마주본다. 아시아는 ‘리비아’라고 적힌 아프리카 북부, 아라비아반도, 인도 아대륙이 대충 붙어 있다. 이탈리아 반도와 아프리카 북부 사이에 있는 바다가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옆에 있는 그리스반도와 지금의 터키(ET 머리처럼 생긴) 사이에 있는 바다가 에게해, ‘EUXINE’라고 적힌 곳이 지금의 흑해다. 대륙 덩어리를 OCEANUS, 그리스신화가 말하는 거대한 대양강(혹은 그곳을 관장하는 신 오케아노스)이 둘러싸고 있다. 

‘헬라스’는 위 지도에서 보듯 “에게해를 둘러싼 지역 전체”를,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에게해 동쪽의 아시아 문명을 제외한 에게해 서쪽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헬라스 시대의 ‘동양’(오리엔트)의 의미도 지금의 동양 전체가 아니라 “트로이,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해해야 한다.

해양 문명과 로고스의 발달

이처럼 기본 개념 정립을 한 뒤, 책은 그리스 문명의 성격을 결정짓는 헬라스 세계의 바다에 주목한다. 헬라스는 크고 작은 폴리스¹로 구성되어 있었다. 헬라스가 중앙집권적 왕조국가(페르시아 같은)를 이루지 못했던 이유는 폴리스들 사이에 있는 지리적 정치적 장벽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을 일구는 대신 바닷길을 이용해 장사(교역)에 나섰다. “우직하게 땅만 파면 되는 농사와는 달리 장사를 하려면 말을 잘하고 계산이 빨라야 한다. 그래서 말, 계산, 화폐가 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따지는 문화가 성립했다.”(p.28) 전반적으로 모험심도 강했고, 개방적이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의 이런 특징들을 함축하는 말로서 ‘logos’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고스의 표현 양태인 문학 양식의 변천사를 그리스 역사와 나란히 대조하면서 BC 8세기경 철학을 빚어낼 그리스 사유의 고유한 특성을 고찰한다.

책 33쪽에 정리된 헬라스 역사의 주요 타임라인을 보자.(볼드체 강조는 원저자의 것, [ ]는 글쓴이의 추가)

저자가 볼드체로 강조한 세 차례 전쟁은 워낙 유명하고 역사 시간에도 다루는 주요 사건이라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듯하다. 트로이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은 헬라스와 오리엔트 지역이 충돌한 사건이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헬라스 지역의 내분이었다. 헬라스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은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 전쟁은 BC 525년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헬라스와 세 차례 충돌한 사건이다. 50년가량 지속된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패권을 쥔 헬라스의 폴리스 '아테네'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고 전후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현전하는 최초의 헬라어 문헌이다. 서사시는 “한 집단의 역사(mythos=이야기)를 묘사하는 장르다. 서정시는 집단의 경험보다는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다. 즉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서정시 양식의 등장은 ‘데모스’(demos)의 출현을 예고한다.

서사시로부터 서정시로의 이행, 참주정으로부터 민주정으로의 이행기는 고달프고 불안정한 시기였다. 당시 서정시를 채운 정서는 허무, 죽음, 고독, 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사랑이 주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위대한 그리스적 가치들”이 형성되었다.

산문 시대인 BC 6세기에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운문도 사용했지만) 처음으로 산문이란 양식을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 BC 5세기 헬라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전승의 벅찬 감동,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 상이한 입장들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불꽃 튀기는 논쟁들의 파노라마, ‘휘브리스’(상궤를 벗어남)가 빚어낸 참혹한 비극들”(p.38)을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펼쳐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 지혜

민주정과 철학을 탄생시킨 그리스의 역사에서 오늘날까지도 중요하게 사용하는 많은 개념(존재, 기예, 운명, 형상, 정의, 실재, 실체, 본질, 원리, 원인 등)이 주조되었음을 발견한다. 그 개념들은 의미 변화를 겪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 민주정과 철학의 시작에 연관된 개념으로서 ‘정의’의 용법과 그 의미론적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정의의 의미론적 변화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그리고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통해 살핀다. 저자의 논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장을 누빈 영웅들에 관한 서사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청동기 시대 귀족들의 세계”를 반영하는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함락에 결정적 역할(목마)을 한 오뒷세우스가 이오니아의 이타케섬으로 향하는 귀향길에서 겪는 모험과 고난 이야기다. 오뒷세우스도 전쟁 영웅이지만 『오뒷세이아』에는 『일리아스』와 달리 용기와 명예 외에도 “지혜, 인내심, 언변 등 다양한 가치들”이 등장한다. 이는 『오뒷세이아』가 “이미 민주주의의 싹이 트고 있던 시절”에 쓰인 텍스트라는 근거들이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뒷세이아』의 신들은 『일리아스』의 신들보다 훨씬 윤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신통기』는 신들의 계보를 계통적으로 서술한 서사시이다. 계통적 서술이라고 할 때는 계통을 '어떻게' 세울지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작자의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헤시오도스가 “어떤 윤리적 동기", 풀어서 표현하면 “왜 제우스가 마지막 패권을 잡을 수 있었는가”라는 윤리적 명제에 답하려 했다고 본다.

저자는 헤시오도스의 다른 작품 『노동과 나날』도 중요하게 다루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다만 유념할 점은 헤시오도스의 시대에 정의의 개념은 단순히 ‘관습’을 뜻했다는 것. 다시 말해 관습을 지켜 “상궤(常軌)를 이탈하지” 않는 것이 정의였다. 부정의에 해당하는 ‘휘브리스’(hybris)라는 단어는 ‘오만’의 뜻을 함축한다. 헬라스의 드라마 주제로 등장하곤 하는 ‘복수’는 거친 형태의 정의 실현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지혜에서 우주에 대한 지혜로

그리스의 역사는 정의 개념을 확립되고 실현한 역사였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고대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민주정이 개화할 수 있었다. 참주들의 실정과 이로 인한 삶의 비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여정에서 정치적 지혜(sophia)가 성장했다. 그리고 바로 이 소피아의 추구가 자연철학(philosophia)의 추구로 관심사를 확장해 간 것이다.

앞서 서정시 시대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당시 서정시는 비관적 정서가 주를 이뤘다.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반동의 정서는 사랑 외에 정의로도 나타났다.

더 이상 태양의 운동을 뮈토스로써는 수긍할 수 없게 된 최초의 철학자들은 먹고사는 일에서 자유롭고 유복한 식민지 출신이었다. 이들은 여유롭게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기 생각을 산문으로 써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이때의 철학은 지금의 철학이 아니라 순수 학문 전체(지금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포함)의 개념이었다. 이 즈음 다양한 뜻을 함축했던 ‘로고스’도 “사유하고 개념화하고 논증하고 논쟁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으로 의미 변환을 겪는다.

다음 화는 그리스 철학의 출발점인 ‘자연철학’을 살펴보는 <2장 퓌지스의 탐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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