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약선생의 철학공부, 공부철학

그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아스피린 여기 있어. 더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물컵과 함께 아내가 아스피린을 쥐여주며 말했다. 아마 새벽 네 시쯤 되었나 보다.

전날 나는 1박 2일로 간 회사 프로젝트 워크숍에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워크숍 동안 어려운 과제를 소화해야 했고, 끝나고 술도 꽤 세게 마셨던지라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삼십대 직장인에게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하고 여느 때처럼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새벽에 눈을 떠보니 머리가 깨질 듯했다. 어찌나 심한지 마치 보이지 않는 칼에 머리가 잘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몸은 공사판 구석에 쌓인 강판처럼 움직여지질 않는다. 내 신음소리에 깨난 아내가 몇 알 찾아 먹여준 아스피린으로도 머리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나’라는 기계가 고장 났는지 모른다. 삼십여 년간 살면서 쌓인 죄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들어오는 것일까. 그것들이 이제는 봐줄 수 없다는 듯 칼, 송곳, 톱을 총동원해서 최종 마무리를 지으려는가 싶다. 놀이기구의 운전자가 내가 기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라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새벽 내내 땀과 신음소리로 뒤척이다, 결국 아내 손에 이끌려 기다시피 동네 병원을 찾았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혈압을 재고, 배며 등에 청진기를 갖다 대더니, 내 눈을 천천히 보면서 말한다. “이러시면 죽습니다. 술·담배는 끊으셔야죠.” 혈압이 180(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이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워낙 높아 깜짝 놀란 기억만 강렬하다) 넘게 나왔다. 주사를 맞고 링거를 갖다 끼우고 한 시간 정도 누워 있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응급실 철제 침대 위에 갇혀서 죽어버린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입으로 〈밤이 깊었네〉를 읊조려보았지만, 낑낑대는 개의 한숨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사실 나는 회사에서도 유명했다. 술을 워낙 잘 마셔서 주당으로 소문나 있었고, 담배도 하루에 세 갑은 족히 피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존심 때문에 회사 일은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는 편이었다. 회사 일도 잘 해내는 편이고, 술도 곧잘 마시니 이른바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일과 술로 평가받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업보가 머리끝까지 쌓였다. 돌이켜보면 무언가 새로운 것이 찾아올 때면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상처들을 헤집고 들어와 그곳에 먼저 고이는 모양이다. 정말 아팠다. 의사 할아버지의 “이러시면 죽습니다”란 말이 정확하게 상처를 쑤셨다.

그러자 이 말이 막혀 있던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간사하게도 아프니까 살아보려고 들렸다. 그 전에도 귀로는 숱하게 들어왔으나, 마음으로는 듣지 못했던 그 말이 아프니 살아보려고 들렸다. 마치 무언가가 육체의 선을 넘어서 드디어 내 마음에 당도했다는 신호를 요란하게 알리는 것 같았다. 나도 지금 죽을 수 있다. 이 말이 주는 무게감이 고통만큼이나 진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혀 신비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편의적으로 삶을 살았더라도 죽을 듯이 아프면 도망칠 곳이 없어져서 삶이 본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사태가 발생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정신도 싹튼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가항력인 사태에 대처할 때 해야 할 첫 번째는 우선 무능력한 자신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선 이 무능력이야말로 이 사태를 돌파할 때 유일한 동지이자 해결책임을 깨닫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모든 사태를 사태가 아닌 게 되게 한다. 그러니까, 무능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너무 빨리 뛰어왔어, 이러지 않아도 충분했을걸. 저기 봐. 느릿느릿 거북이 어느새 저기 언덕에서, 산들바람과 놀고 있잖니? 모든 것을 내려놔 봐.

그 순간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온종일 눈썹까지 끌어당긴 이불 속에 있으면서 철학 공부를 해보리란 생각을 한 것이다. 우연한 생각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다. 그때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운동해야겠다거나, 종교를 찾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이상하게도 오래전 한겨레 신문 문화면에 나온 이상한 연구소를 떠올렸다.¹ 회사원부터 학생, 교사, 주부도 인문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언제 한번 가서 강좌를 들어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퍼뜩 떠오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때 두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연구소 기사를 머리에 떠올리게 된 연유를 알지 못한다. 머리가 잘려 나갈 것같이 아픈 그 상황에서 건강이나 종교가 연상되지 않고, 철학이나 문학, 심지어 정치철학을 공부한다고 소문난 곳을 연상하다니. 나는 훗날 당시의 내 감각으로 본다면 이곳을 가장 쓸모없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무능력이 찾아오자, 사회통념으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을 찾다니!

다음 날 머리가 좀 진정되자 인터넷에 바로 조회를 해보았다. 김윤식 선생님의 한국 근대문학사를 탐색하는 강좌², 박지원이나 이옥 같은 18세기 지성사 강좌 그리고 사진과 물리학 강좌도 있었다. 이상하게 강좌 소개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다. 심각하게 아프고, 죽을 수도 있다는 진지한 두려움이 있고 나서 이런 소개를 보니까,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들어서고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그 순간에는 그저 강좌 소개만 읽어도 생기가 솟아났다. 손바닥보다 작은 가슴에 이런 기운이 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중에 처음 들어본 철학자의 강좌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읽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이 있는 모양인데, 이 책을 여섯 번에 걸쳐 해설해주는 강좌였다. 벤야민이라는 철학자의 이름도 생소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은 더더욱 생소했다. 책을 조회해 보았더니, 두 권에다 2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다. 소처럼 오래오래 씹어 먹을 책이었다. 그때는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철학자와 어려워 보이는 책이 굉장히 귀해 보였다. 그때 내 감각이 기묘했다면 이런 것들이었다. 마치 꽃모종을 하듯 귀한 마음을 갖고 강좌 신청을 했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 역시 회사는 내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돌아갔다. 주말 내내 아팠지만, 회사는 지하철처럼 튼튼하게 돌아갔다. 거기 치이지 않으려면 다시 야근에, 술자리를 피하기 쉽지는 않다. 아마 몇 주 내내 야근을 하고 술자리에도 꼬박 참석했을 것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혈압 180이 넘는 진단을 받고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니. 그러나 내 반평생은 언제나 그랬다.

다시 야근과 술자리로 채운 후 찾아온 첫 강의 일자인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그날은 아침 출근 시간대부터 내린 폭설에 길이 엄청나게 막힌 날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날은 이라크 바그다드에 1세기 만에 눈이 내린 날이라고 했다. 오후 들어서도 눈이 그치지 않았다. 퇴근 무렵 어지간히 일을 끝마치고 나서 말린 물고기처럼 의자에 앉았다. 강의 시간은 저녁 7시. 몸은 이미 폭설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의자에 머무는 한 나는 쉴 새 없이 술을 마시러 가거나, 아니면 일거리를 찾아 야근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일주일 전 두통을 머리에 떠올리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도 다시 야근과 술자리를 거듭한 짓을 미친 짓으로 여기려고 노력했다. 결론은 일단 한번 강의에 가보자는 것. 거기까지 가면 아마 그다음은 어떻게 되겠지. 근거는 없지만.

밖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숙대 앞에 내려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해방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앞이 안 보이는 사거리에서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수유너머’라는 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탁월한 곳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한동안 헤매다 약국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찾아 내려가다 겨우 알아낸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7시가 지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강의는 1~20분 정도 지난 모양이었다. 구석에 자리 잡고 자료를 뒤적였다. 나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글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몇몇 분이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원래부터 이 공부를 해온 분인 듯 강의에 열중하며 열심히 필기 중이었다. 아마 이쪽 계통에서 학교에 다니는듯했다. 형광등 아래 나만 이상한 외톨이인 듯이 느껴졌다.

내가 살던 세계(은행)와는 확연히 다른 언어가 오고 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그러나 이게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외톨이가 되어 갈수록 이상하게도 그 언어들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외톨이로 미세해져서야 이 세계를 떠나 저 세계로 갈 수 있는 모양이다. 뜻도 모르는데, 생기는 몰입이라니. 강좌 소개를 읽었을 때 솟아나던 생기가 이상한 열기로 나를 감쌌다. 내 귀를 때리는 저 뜻도 모르는 단어들이 무척 아름다웠다. 창밖에 내리는 눈과 형광등, 그리고 그사이를 날아다니는 철학 용어들.

선생님이 말하는 언어가 공중을 날아서 수강자들의 귀로 들어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뭔가 아름다운 것들이 슬로비디오 화면의 총알처럼 공기를 가르고 수강자들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매우 유물론적인 상상이다. 나는 공중에 흐르는 말이 보인다고 여겼으니까. 그만큼 기괴한 감각인데도, 내게는 꽤 합리적으로 여겨졌다는 점이 더 기괴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시간을 내쫓는(die Zeit vertreiben)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³고 말한다. 시간을 충전하는 자, 그는 산책자이다. 그동안 지하철 열차처럼 정신없이 달리기만 해서 지상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나는, 이제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슬로모션으로 날아가는 총알 이미지는 이 초보 산책자가 언어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바라보고서 느낀 쾌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평생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 뒤에도 인문학에 대한 온갖 사기적인 선동들이 있었지만, 모든 사태를 그날의 감각으로 판단하고 생각했다. 만일 철학이 내가 그날 본 그 철학이라면, 그것은 내게 시간을 충전시켜주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눈발이 펄펄 내리는 그날의 기억이 사금파리처럼 깨져 어떤 것은 어렴풋하지만, 총알같이 날아가던 이 세계 언어들의 아름다움만큼은 내게 선명하다. 나는 그날 수업이 끝나고 나가면서 남은 담배를 휴지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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