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살아가는 한국 Z세대입니다

“영현, 나 조금 있으면 궁극기 쿨타임 돌아와, 좀만 기다렸다가 한타하자.”¹ 2학년에서 3학년으로 가기 전 겨울방학. 곧 있으면 취업 준비 시즌이 다가온다는 불안과 캠퍼스가 간다(神田)라는 도쿄 중심가에 높이 솟은 마천루로 바뀐다는 설렘으로 가득한 겨울.²

유학 초기에 “나 이제 한국 안 돌아갈 거야”라고 했던 굳은 마음가짐은 어디 갔는지, 도봉구 끝자락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가 그리운 나는 ‘면학을 위해 산 가성비 좋은 노트북’으로 중학생 때 친구들과 롤을 하며 2019년의 끝자락을 보냈다.

싸구려 어휘를 쓰며 경쾌한 게임을 하는 것으로 내 기분을 달래기에는 모자랐나 보다. 트와이스를 좋아하는 대학 동기 쿠마가이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함께 2월에 서울 가자!” 입학 연도는 같지만 국가의 부름 덕분에 나와 2학년 터울인 쿠마가이는 졸업여행을 고민하던 차 현지 가이드를 자처하는 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2017년 8월부터 공익근무요원 아니 사회복무요원으로서 2년 근무를 끝마치고 대학으로 복학한 지는 반년밖에 안 됐지만 외로움은 반만년이라 서둘러 항공권을 예약하고 엄마 아빠한테 “나 한국 간다!”라고 급하게 카톡을 보냈다. 그런 내 모습이 마치 “종전이요!”라고 외치며 호외를 알리는 뉴스페이퍼 보이 같아 웃음이 났다.

“야, 근데 한국 위험하지 않냐? 마스크도 부족하다던데⋯.” 출발 전날 한국 여행 정보를 검색하던 쿠마가이가 한국의 마스크 관련 뉴스를 보고 걱정스레 얘기했다. 쿠마가이는 이번 겨울방학이 대학에서 마지막 방학이었기에 한껏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라멘의 반숙 달걀을 반으로 가르는 친구를 나는 K-방역을 선전하다시피 열변을 토하며 안심시켰다. “2박 3일 사이에 큰일은 안 나겠지.” 나는 이렇게 친구 앞에서는 쿨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때 나의 내심은 우리 집 고양이가 너무도 보고 싶어 그런 걱정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한국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 태도에는 다른 근거가 있었다. 일본판 당근마켓인 ‘메루카리’에서 100엔 샵의 마스크 뭉치가 시장 논리에 의해 ‘적정’ 가격에 판매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지적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싼 마스크 뭉치가 5만 원에서부터 비싼 마스크는 10만 원까지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보니 나에겐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느껴졌다.

‘올해 태풍은 역대 최고 풍속’이라는 뉴스로 인해 마트에 남은 식재료라고는 간장과 식용유뿐이었던 작년 9월을 잊었던가! 아뿔싸, 올해도 이미 때늦었다. 내 단칸방에 있는 마스크라고는 여자친구가 남겨 놓은 ‘작은 얼굴용’ 마스크 3장.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나는 급히 집 근처 드럭스토어로 향했다. 아직 우리 동네는 패닉에 휩싸이지 않은 건가? 웬걸 50개입 마스크가 뭉텅이로 쌓여 있었다. “아 그럼 그렇지! 아직 아니지! 그냥 엄살 부리는 사람들이나 그런 거지!” 하고 마스크 뭉치를 집어든 순간⋯ ‘어린이용’이란 문구가 내 안구를 강타했다.

‘이 가게만 그러겠지.’라는 현실 도피 후 역 주변 편의점과 마트, 드럭스토어를 모조리 뒤졌다. 가는 곳마다 A4 용지에 급조한 “마스크 품절” 안내문을 내붙이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성인용 마스크를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든 순간, 크레용으로 그린 깜찍한 일러스트가 있는 마스크 뭉텅이를 에코백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본 사회의 수면 아래에서는 역병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 일본 미디어에서는 한국의 방역체계를 비판하며 중환자의 무조건적인 병원 격리를 의료 붕괴로 이어질 거라는 비관적인 시선을 내보이고 있었다.

또 일본 내 감염자에게는 자가격리를 장려했고, 일본에 도착한 크루즈선 내 집단 감염은 일본에서 감염된 것이 아니라는 둥 집계를 거부하며 역병을 해외 토픽인 양 다루고 있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역병에 대한 검사 횟수 자체도 제한하여 일본은 아직 안전하다는 듯이 선전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언론과 정부의 이러한 대처에 익숙한 듯 일본 시민들은 정부와 미디어에 대한 신뢰라고는 없는 듯 행동했다. 비단 이 시국뿐만 아니라, 태풍만 온다 하면 마트는 거덜 나고, 지방자치는 힘을 잃어버리고, 수재민이 발생한다.

그리고 수재민들에 대한 보상이나 복구는 더딘 속도로 이루어져 태풍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는 기간에도 전력이 복구되지 않은 소규모 마을이 존재한다. 후쿠시마 사태를 필두로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듯이, 일본의 사회안전망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떠밀린 지 오래다. 

여차여차 대학생 3학년의 비루한 사고로 일본 사회에 대한 고찰을 끝마친 나는 나리타 공항으로 향했다. 미디어와 인터넷상의 역병에 대한 공포심은 어디로 갔는지 언제나 그렇듯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의 케이오선(京王線)은 차창에 비치는 낮은 전원주택들과 철로 건널목의 경보 소리 그리고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과 귀여운 버킷햇을 쓰고 산책하러 가는 노부부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어 미소를 자아낸다. 내가 좋아하던 일본의 풍경 아니던가. 지금은 이런 풍경이 오히려 인지 부조화를 자아내 불안한 마음과 일본인들에게 연민을 품게 만들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 후 한산해진 출국 심사대를 통과해 출발 게이트까지 지체 없이 한걸음에 도착했다. 관동 지역에서 환승편 비행기와 도착하는 비행기가 꽤 많은 나리타 공항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에는 “한국을 좋아할 것 같은” 소수의 20대 일본 여성을 제외하고는 귀국하는 유학생 아니면 가족, 드문드문하지만 인천에서 환승할 거 같은 느낌의 서양인 백패커들이 있었다. 한창 트와이스를 필두로 한류 유행에 불이 붙었을 때라, 나리타에서 타는 서울행 비행기는 한국 아이돌을 동경하며 한국 패션을 모방하는 20대 여성들로 붐볐었다.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는 아이돌 팬덤의 기세도 꺾여버린 것이다.

“곧 우리 비행기는 인천국제 공항에 도착합니다.” 인천은 생각보다 더 굳은 분위기였다. 비행기 편수 자체가 줄은 모양이라 인천공항도 나리타와 같은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원래 붐벼야 할 두 공항이 아닌 모습을 경험한 나는 좀비 아포칼립스를 피해 도망온 신세 같았다.(도망이라 해야 할지, 가족이 걱정돼 찾으러 나선 등장인물의 심정이랄지.) 걱정 반절과 고양된 기분 반절을 마음속 상자에 억지로 구겨 넣고 도봉구행 리무진 버스를 찾는다. 

다행히 부모님은 일본인 친구가 오면 언제든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허락해주신 덕분에 우리는 지체 없이 도봉구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서울 끝자락이었다. 쿠마가이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인 빽빽한 아파트 단지, 일본에서는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건물이란 인식에 처음에는 신기한 얼굴이었다.

나는 쿠마가이에게 서울에 과잉된 정치·경제·문화적 인프라는 도쿄와 마찬가지거나 오히려 그 이상이라는 설명과 5천만이라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닭장 같은 구조의 아파트 단지의 합리성에 대해 설명했다. 이내 쿠마가이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현관문 안쪽에서는 부모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본에서는 도어락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오랜만에 입력하는 비밀번호에 위화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보는 우리 집 고양이, 처음에는 경계하다 싶더니 금세 반갑다는 신호로 내 정강이에 박치기를 하듯 자기 얼굴을 비볐다. 그렇게 한참을 고양이랑 뒹굴고 있던 내게 부모님은 늘상 있는 일인 듯 무심하게 한마디 건네셨다. “오늘 손님 한 명 더 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소식에 쿠마가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가족이면 모를까 다른 손님도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에 적잖은 불편함을 느낀 나는 숙소를 따로 잡기로 마음먹었다. “쿠마가이, 진짜 미안한데 우리 호텔 잡아야 할 것 같아.” 쿠마가이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절반가량 푼 짐을 다시 여행용 가방에 넣었고, 우리는 고양이와의 짧은 재회를 마무리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나는 급하게 인터넷을 뒤지며 대학생 두 명이 묵을 만한 가성비 호텔을 찾았다. 인터넷에 주르륵 나오는 호텔들은 손님을 잡지 못한 듯 눈을 이끄는 빨간색 글자로 할인을 부르짖고 있었다. 기쁜 것도 잠시 이것도 전부 역병의 영향이라 생각하면 빨간색 글자의 할인 문구는 소상공인의 피눈물이 아닐까 생각되는 밤이었다. 

어젯밤의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나와 쿠마가이는 DDP 근처 골목에 있는 3층 규모의 호텔에서 눈을 떴다. 여자친구가 한국에 몇 번 여행 왔던 덕분에 20대 일본인을 가이드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대표적인 명동거리와 광화문, 경복궁을 훑고 홍대거리까지, 내 머릿속에는 이미 하루하루 계획이 분명했다. 

그 이후로 나와 쿠마가이는 작년 2, 3월경의 텅 빈 명동과 홍대의 길거리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광화문이다. 나는 광화문을 한국의 아고라라고 설명했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장소이자 민주주의 사회를 대변하는 듯한 끊이지 않는 시위가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대를 아울러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일본의 Z세대이자 유토리 세대³ 인 쿠마가이에게 열심히 어필했다. 그때 쿠마가이의 얼굴은 정치에 등져버린 여느 유토리 세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내 열띤 설명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토리 세대는 정치에 대해 ‘권리’ 보다는 ‘개인의 자유’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솔직히 자랑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주변국의 20대가 본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독선적인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계몽시키겠다는 마인드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일 수도 있기에 나는 뜨거운 감자를 다루듯 하되 깊은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누고 싶기도 했다. 

별반 다를 것 없는 여행을 끝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부모님이 좀 더 한국에서 쉬다 가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쿠마가이 혼자만 인천공항으로 보내고 말았다. 한국에서 오랜만에 우리 집고양이와 함께 요양할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이 기회가 위험을 초래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마지막으로 늦은 자기 소개를 하자면 이 글을 적는 나는 문창윤이고, 현재 일본에서 유학 중인 대학교 4학년이다. 깊이 있는 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20대 남성이 한국과 일본의 경계선에서 느끼는 점을 가볍게 풀어 나갈 이 글을 읽는 모두와 공유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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