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존재들을 위한 새로운 생명론

○ 에피소드1 : “ADHD 진단받아서 다행이야.”

몇 달 전, 한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놀라운 얘기를 했다. 최근에 ADHD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상 밖이었다.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긴 했지만, 돌연 ADHD라니. 그 정도로 집중력이 부족한 ‘증상’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인 ADHD가 요즘 흔하대도 아주 가벼운 증상이라 해도, 사뭇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이보다 놀라웠던 건 그의 태도였다. ADHD 진단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워 보였다면 조금 지나칠까. 걱정하는 나와 달리, 그에겐 약간의 미소도 비쳤다. 확실히 그는 편안해하는 것 같았다. 의아했다. 아무리 경증이라도 어떻게 정신질환 진단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거지? 걱정과 불안이 더 심해지지 않나? 괜찮은 척하려고 되려 씩씩하게 말하고 있는 건가?

얘기를 나눠보니 의문이 풀렸다. 그는 늘 불안했더랬다. 생각은 이리저리 드나들기 바쁘고, 하나에 쭉 집중할 수 없고. 컨트롤조차 할 수 없는 자기 마음에 속수무책인 심정. 게다가 이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토로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었단다. 당연하다. 내가 봐도 ‘증상’이 전혀 없으니까. 공감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나 역시도 증상을 부인할 정도였다.

고민 끝에 정신과를 찾아갔단다. 간단한 몇 개의 검사 끝에 “ADHD네요, 심하진 않지만.” 의사가 무심하고 사무적으로 말했음에도, 그때 편안해졌다고 했다. 걱정과 불안이 커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당장엔 그 마음이 제대로 이해되진 않았지만, 축하 비슷한 걸 해주었다. 어쨌든 본인의 불안이 줄어들었으니 그걸로 됐다고.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곱씹어보았다. 왜일까. 어떻게 ADHD 진단에서 안도감을 느꼈을까? 그동안 그의 속마음이 어땠을까. 방황하는 생각들을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 자기를 엄습해오는 불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들이 내면에 있었을 것이다. 짐작건대, 이 세상에 나 혼자 잘못되었다고, 혹은 나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ADHD라는 진단명을 받는 순간, 이 모든 불안의 정체가 밝혀졌고 적절한 이름이 붙었다. 또한 익히 들어온, 사회적으로 공인된 진단명을 받으니 자신의 불안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막연한 불안을 ‘ADHD’라는 용어로나마 붙잡을 수 있으니, 그만큼 편안함을 얻은 것이다. 확실한 불안이 주는 역설적인 안정이랄까.

정체가 인정되었다고 생각하니, 친구 말처럼 장점도 꽤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힘든 불안에도 이제 이름이 생겼다. ADHD라고 말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겪는 내면의 고통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불안증이 인간관계를 떼어놓는 경우가 아직도 대부분일 테지만, 때로 관계를 맺어주는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아가 진단명은 삶을 살아가는 지침까지 제시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막막함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나. 그런데 ADHD로 진단받으면, 일련의 계획이 생긴다. 규칙적으로 약 복용하기, 정기적인 병원 방문, 스트레스를 줄이는 구체적인 과제까지.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우리 자신, 우리 시대, 우리 불안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불안하다’는 진단명 속에서 안정감과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불안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불안을 관리한다는 명확한 목표와 계획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ADHD라고 진단받아서 다행이야.” 친구의 이 말이, 이제 나에겐 “ADHD 진단받아서 살아갈 수 있다”로 들렸다.

○ 에피소드2 : 공황장애의 ‘리얼’한 환상.

연재를 시작하며 전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무심코 TV를 보았다. 마침 공황장애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예전엔 연예인들만 겪는 병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일반인의 병례도 매우 많다는 것, 다른 불안장애와 함께 동반되기 쉽다는 것 등이 소개되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끈 건 ‘인지행동치료’였다.

우울증이나 불안증세를 비롯한 다양한 심리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약물치료를 부정적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약물치료가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치료책이 된 지 오래다. 환자 쪽에서도 약물치료를 선호한다. 여기엔 다소 복잡한 문제가 있으니, 다음 기회에 다뤄보자.

반면 인지행동치료는 환자가 느끼는 인지감각이나 행동을 교정하는 치료방식이다. 여기선 증상의 원인을, 자기 및 타인에 대한, 혹은 특정 사물에 대한 인지나 태도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우울감이나 불안감의 원인이 되는 인지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런 감정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인지행동치료는 상당히 발전해 왔다.

다큐멘터리에서 등장한 인지행동치료는 ‘노출치료’였다. 강한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 환자를 노출시켜 인지방식을 변경하도록 유도한다. 인지행동치료엔 다양한 치료법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노출치료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래서인지 인지행동치료가 그대로 노출치료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효과가 가장 검증된 인지치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상의 환자 분은 대중교통, 특히 사람 많은 출퇴근길 지하철이 문제였다. 어찌어찌 지하철 플랫폼까지 왔더라도, 지하철이 도착해 타려고 하면 과호흡과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극도의 불안감이 밀려온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표현으로는, 환자 본인에겐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듯 하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이럴진대, 출퇴근하는 일상생활은 아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노출치료는 이 환자에게 지하철 상황을 조금씩, 단계별로 노출시킨다. 처음에는 지하철 입구, 그다음엔 개찰구, 이후엔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보는 것까지만(타지는 않는다) 진전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다 적응이 되었다 싶으면,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식으로 늘려 간다. 노출 빈도나 시간 등의 조건을 바꿔 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다큐멘터리에선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플랫폼까지는 내려왔지만 도저히 지하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하철이 사고가 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다른 열차가 부딪힌다거나, 역사 천장이 무너져내린다거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애써 웃음 지으며 “앞으로 노력해보겠다”는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 영상의 내용과 환자의 마지막 표정은 나를 사로잡았다. 정신과 전문의가 아닐뿐더러 정신질환에 문외한이었던, 그저 철학을 공부하는 나에게, 이는 당장에 철학적 문제로 보였던 것이다. 최근의 철학 및 인류학, 또는 내가 철학적 관심에서 읽고 있는 신경생리학 등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후 연재 내용이 되겠지만) 이 논의들의 결론 중 하나는, 단일한 공통‘세계’가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 세계, 이 현실을 살아간다. 이를테면 우리의 일상세계에서 지하철이 사고날 확률은 거의 제로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지하철을 걱정 없이 타고 내린다. 이런 입장에서 공황장애 환자를 보면, 지나친 우려, 나아가 ‘잘못된’ 걱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세계’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각각 자신이 이해한 자기 나름의 세계를 살아간다. 최근의 인류학은 이 ‘존재’의 범위를 동식물이나 숲과 같은 생명까지 확장시킨다. 즉 모든 생명은 종 수준이든 개체 수준이든 자기 나름의 세계를 형성하고 그 형성된 세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여기엔 모든 존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단일한 현실은 없다.

그렇다면 공황장애 환자는 과도하고 ‘잘못된’ 불안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 환자 분이 인지적으로 형성한 세계에선 지하철이 쉽게 충돌하고 건물은 자주 무너진다. 그 세계에선 지하철을 타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체감하는 세계와 다르다는 점에서 불편하고 위화감도 크겠지만, 철학적으로 결코 ‘잘못된’ 불안감은 아니다. 그 불안은 거짓이 아니다!

○ 새로운 철학, 새로운 치료

이 연재는 이런 에피소드들에서 촉발되었다. 우리의 불안은 이미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한편에선 불안 ‘덕분에’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불안에 기대어 편안하다는 아이러니! 다른 한편에선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방치된다. 도저히 어찌해 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약물로 제어하든, 상황을 마주해 스스로 좋아지길 기다리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철학이 이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다. 사람들이 이런 정신적인 문제로 나날이 고통받고 있는데, 인간 ‘정신’과 사유를 다룬다는 철학은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즉 철학적 사유는 불안하지 않는 ‘안정된 정신’을 전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 그런 정신은 어디에도 없다.

의학적 치료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약물치료도 필요하며, 인지행동치료도 매우 정교하고 효과적인 치료법 중 하나다. 나는 다만 여기에 새로운 치료 하나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의학적 방법과 병행할 수 있는, 새로운 앎과 사유방식에 기초한 새로운 치료를. 부족하나마 그 길을 모색하려 한다.

우리 존재는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넘어서 있다. 우리 생명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다. 이 점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연재에서는 존재와 생명의 힘에 주목하려 한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중동태, 자기조직화 이론,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 다양한 정신질환에 관한 논문들, 그리고 스피노자를 함께 엮어볼 생각이다.

연재 형식이니만큼, 매번의 글이 연속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선형적인 글이라기보다, 미지의 땅을 더듬어가는 탐사에 가까웠으면 좋겠다. 어떤 좋은 이론을 만나면, 거기에 거점을 확보하고 주변을 탐색한다. 그러곤 새로운 논의를 찾아 다시 떠난다. 때때로 지난 거점으로 돌아와 새로 발견한 지역과 연결한다. 이러면서 전체 지도를 점점 확충해 가려 한다.

자, 이제 모험을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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